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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리뷰 : : 기타

월미도에서 만난 "한국 이민사 박물관" 인천 가볼 만한 곳 추천

by 환희환희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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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을 좋아하시나요?

아름다운 걸 보고 느끼고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역사를 알아가고 공부하게 되는 그런 시간을 잠시 가지는 것도 여행의 매력인데요. 그래서 여행지 근처에 있는 박물관 전시관이나 왕릉이나 그런 곳들을 곧잘 찾아가는 편입니다.

얼마 전 월미도에서 먹은 무한리필 조개구이집을 소개했었는데, 오늘은 월미도 메인 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국 이민사 박물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월미도 왔으면 무한리필 조개구이! 송도회집 조개구이 세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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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의 목적은 오로지 조개구이를 먹기 위해서였다. 무한리필 조개구이가 많이 있다는 월미도. 바람도 쐴 겸 겸사겸사 왔다. 월미도 놀이공원 뒤편을 지나다 주차장을 발견하고 일일 주차요

hwan-forever.tistory.com


 인천 가볼 만한 곳, 월미도 필수코스

한국 이민사 박물관

한국 이민사 박물관 입구

처음부터 월미도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은 아니었다. 월미도에 도착해서 이정표를 보는데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들러보게 되었다. 이민사박물관 앞에는 주차장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건물 입구

다행히 박물관은 정상운영 중이었다. 외관으로 봤을 때 박물관은 지어진지 조금은 되어 보였다. 

 

 

한국이민사 박물관 입구

박물관이므로 월요일은 휴관. 우리는 주말에 방문했으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입구에 들어오면 마주하는 모습.

박물관 입구로 들어오니 바로 이런 내용을 마주할 수 있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
이 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해외 활약상과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재외 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 건립한 것입니다.
2008.06.13

2008년도라니 십년도 넘어 거의 15년이 다 되어가는 곳이다. 월미도 방문이 오랜만이긴 하지만 10년은 안되었는데 그때는 이런 박물관이 있는지도 몰랐다. (관심이 없어서 지나쳤던 것 같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종합안내도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총 4개의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다.

 

  • 1 전시실 :  이민자의 발자취/ 도전의 출발지, 인천/ 제물포 항 1902년/ 최초의 이민
  • 2 전시실 : 사진결혼, 공동체 형성, 활발한 교류와 융합, 독립에 대한 염원 외
  • 3 전시실 : 멕시코 쿠바 러시아 중국 일본 사할린 중남미 독일 한인사 외
  • 4 전시실 : 하와이와 대한민국, 그리고 인천 외

 

각 전시실마다 소제목으로 다양한 전시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이민사의 연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고,

 

 

해상 교류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대한 설명도 있다.

 

※ 요약 : (출처 : 한국 이민사 박물관 - 월미도 소재)
인천은 중국과의 교류에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백제시대에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외침의 방어를 위한 군사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개경에 이르는 예상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 교동 등이 대외 교통의 거점으로 정비된 적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대외적으로 해금 정책을 실시하여 바다를 통한 외국 선박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600년을 전후로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가 왕실의 보장처로 선택되고 인천 해안 지역이 국방상의 요충지로 부상하였다. 나중에는 중국과 일본에 이어 조선도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인천은 국제 개항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인천은 개항 이후에 조선 최대의 무역항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전국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했다. 일본 및 청국 상인의 활동과 외국 상사를 중심으로 무역거래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은?

우리나라 이민역사에 있어서 하와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나는 예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면서 알았다. 나는 최태성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1900년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하와이는 우리나라와 거리상으로도 멀어서 옛 시대와는 크게 상관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이는 대한제국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 송출이기 때문인데 그때 당시의 하와이 정세는 이랬다고 한다.

 

 

※ 요약 - (출처 : 한국 이민사 박물관 - 월미도 소재)
하와이 정세 
하와이의 기후조건으로 사탕수수 농장이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초창기에는 원주민이 재배하였으나 노동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되고 일본 이민자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노동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자 농장주들이 일본인의 이주를 억제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의 대안으로 농장주들이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하여 이민을 하게 된 장소 하와이. 

이때 옛날 여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집조를 발행했다고 한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서는 도산 안창호의 여권의 사진도 소개하고 있었다.

 

 

전시관 내, 배 모양으로 된 전시실

전시된 내용을 보며 걷다보니 이런 곳이 있었다. 선박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은 전시실이었다. 입구에는 갤릭이라는 선박의 이름도 표시되어 있다. 

 

 

갤릭호는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는 한국인을 태운 이민선의 이름이다. (이민자 제1진을 싣고 간 이민선 이름)

 

 

갤릭호를 묘사한 전시실, - 한국 이민사 박물관

정확히는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 이민자를 태운 뒤 제물포항을 출발했고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신체검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탈락한 사람을 제외하고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및 유아 12명으로 구성된 총 102명이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하와이 첫 번째 이민자들인 이들은 1903년 1월 2일 나가사키항을 떠난 뒤 1903년 1월 12일 호놀룰루 외항에 도착, 다음날 호놀룰루항에 입항했다. 이곳에서도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8명이 탈락하고 부양가족 8명을 포함하여 총 16명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와이에서의 이민자의 삶을 묘사한 전시

갤릭호를 지나면 하와이에서의 이민자의 삶을 묘사한 장소가 나온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와이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삶은 순탄치는 않았다고 한다. 농장에서는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아침 식사 후 6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는데 그 사이에 단 30분간의 점심식사 시간만 허락되었다. 하루 10시간 노동이었고 일요일 하루는 쉬었다고 한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서는 하와이 이민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와이 이민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하와이에 거주한 이민자들 중 노총각들을 위해 사진만 보고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간 이야기나 교회의 역할 등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1905년에 멕시코에서 불법 노동 이민이라니!

2층 전시실을 보고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나라의 한인 이민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아래층에 있던 전시실에서는 하와이 외에도 다른나라에서 벌어진 한인 이민사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나라는 바로 멕시코에 대한 이야기였다.

 

 

1905년 1,033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대규모의 불법 노동 이민이었다고 한다. 그 옛날 불법 노동 이민이라니!

 

※ 요약 (출처: 한국이민사박물관 - 월미도 소재)
그때 당시 이민자들이 탄 이민선의 이름은 일포드호였고, 이 배를 타고 멕시코 남부의 살리나크루스 항구에 도착한 한인들은 30여 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진 뒤 4년간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때 이들의 삶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국내에서도 알게 되어 구제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1909년 5월에 4년간의 노동계약이 끝나 해방될 수 있었으나 멕시코 내란과 혁명으로 인해 한인들의 생활이 향상되지 못하고 1921년에는 288명이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되었다. 

 


인하대학교의 이름,

어떤 의미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계셨나요?

전시의 막바지,

인하대학교에 대한 설명이 전시되어 있었다.

 

설명을 잠시 읽어보니 이랬다.

 

※ 요약 (출처 : 한국이민사박물관 - 월미도 소재)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한 사업으로 인천에 인하대학교가 개교하였다. 인하대학교는 1954년 4월 '인하공과대학'으로 설립한 뒤 1971년 12월 종합대학 '인하대학교'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앞자를 따서 만들었다.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매각 대금 15만 달러가 최초 설립기금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인하대학교가 인천과 하와이의 이름은 딴 것일 줄이야!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박물관에 와서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인천의 이민기념사업에 대한 설명도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세가지.

하와이 이민, 멕시코 이민, 그리고 마지막에 알게 된 인하대학교의 유래.

 

한국이민사박물관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것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독립운동가 분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리나라와 멀고도 먼 하와이, 휴양지로 유명한 하와이에 있다는 게 의아했는데 이런 이민의 과정이 있고 정착하고 있는 이민자들이 있어서 그렇구나 싶었다. 여러모로 박물관을 방문하길 잘했다 싶었다. 아이든 어른이든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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